📚 지란지교를 꿈꾸며-유안진
2025. 7. 16. 00:37ㆍ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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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1986년 유안진 시인이 이향자, 신달자 시인과 함께 펴낸 수필집으로 처음 소개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버전으로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처음 이 글을 접할때의 가슴 벅참이 아직도 여전한걸 보면 참 잘쓰여진 감사한 글 같고, 이런 친구가 있다면 이 세상 살이가 더욱 풍성할것 같습니다. 오늘도 지란지교를 꿈꾸며......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은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친구와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도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는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쳐 주고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 한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겨질 자산이 되었을걸.
우정이라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道)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聖賢) 같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리서 탄로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바랄 뿐이다.
…
…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芝蘭)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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